콤플렉스를 나만의 개성으로 만드는 방법!
긴 말이 필요없다.
진행자로 김어준을 콕 찍었다.
올해는 '장애인의 날'을 기념한 지 40주년이 되는 해다.
아이유, 션, 강다니엘, 최강창민 등.
장애가 있는 신입생이라면, 3월의 캠퍼스에서 때로 외롭고, 분하고, 비참했을 것이다.
먹는 데 쓰지 않았다.
[다른 시선③]
김성태 의원은 총선을 위해 특수학교 부지를 이용했다. 조희연 교육감은 이용할 만한 여론이 뒷받침되고 나서야 정의의 사도로 나서려 한다. 잠자코 있던 나경원 의원도 시류에 편승하기 위해 긴급간담회를 연다. 장애 아이 부모로서 마치 이제야 책임감이라도 느끼듯. 삼총사가 욕을 먹는 이유이며, 장애 아이의 부모로서 내가 자괴감을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아이들은 정치적으로 이용가치가 있을 때만 정당한 제 권리를 찾을 수 있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사살당한 느낌이 들어서다.
빛을 "보아라" 정의를 위해 "목소리를 높여라" 자유를 위해 "일어서라" 앞을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며, 걷지 못하는 이들이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긍정적인 메시지와 함께 사용되는 신체 관련 언어들은 모두 비장애인들에 해당합니다. 반면 부정적인 메시지들은 장애로 연결지어 표현됩니다. 이런 식의 언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우리는 과연 장애에 대한 편견에서 자유로울까요.
결과는 성별에 따라 명확하게 나뉘었다. 남성 노동자가 '해당사항 없음'이라고 답했을 때 그 대답은 '아니요 (구직 과정에서 차별받은 적이 없다)'를 뜻했고, 여성 노동자가 같은 답을 했을 때 그것은 '예 (구직과정에서 차별 받은 적이 있다)'라는 뜻에 가까웠다. 같은 대답이지만 남성과 여성에서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구직 과정에서의 차별만이 아니었다. 월급을 받는 과정의 차별 경험을 측정했을 때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여성의 '해당사항 없음'은 차별을 받았다는 뜻이었고, 남성에서는 반대였다.
보통의 기념일 같다면 난 분명히 주인공이 되어야 할 텐데 내 생애 한 번도 그 날이 기다려지거나 기뻤던 적은 없다. 그리고 수많은 주인공들과 함께 하는 우리 학교에서도 그날을 서로 축하한다거나 인사의 소재로 사용하지도 않는다. 중고등학교를 특수학교에서 다닌 나의 기억 속 그날은 영문도 의미도 모른 채 잠실운동장으로 전교생이 동원되었던 것으로 채워져 있다. 소외 받고 차별 받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들에게 그 중 잘 나가는 몇몇을 띄워주기 위해서 그 안에서조차 다시 구별되어지는 잔인한 고통은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